보글보글 누렇게 익는 막걸리…80여년 묵은 맛과 향에 취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7일 1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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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영한기자 scoopjyh@donga.com
사진 전영한기자 scoopjyh@donga.com
시원한 사이다 캔을 막 개봉한 것처럼 ‘샥~’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성인 2명이 들어가도 될 만한 큰 술항아리에서 나온 소리였다. 항아리 안에는 보글보글 거품이 일어나는 막걸리가 누렇게 발효되고 있었다. 1939년 설립 후 79년째 같은 자리에서 막걸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충북 괴산군의 ‘제일양조장’ 발효실이다.

이곳은 국립민속박물관이 올해 3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근현대 양조장과 술 물화’ 민속조사 현장이다. 10일 박물관 조사팀과 80여 년간 전통 막걸리 생산방식을 고집하는 ‘제일양조장’과 ‘목도양조장’을 찾았다.

● 50년 양조장 외길 ‘제조법으론 설명 안 되는 내공’

“매일 새벽 술항아리를 씻고, 주모(酒母)를 담그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벌써 50년이네요.”

제일양조장 대표 권오학 씨(70)는 덤덤하게 지난날을 되짚었다. 권 씨는 1966년 배달원으로 취업하며 양조장과 인연을 맺었다. 성실히 일한 덕분에 3년 뒤 정직원으로 채용됐고, 1974년부터는 공장장으로 일하며 40년 넘게 막걸리를 만들어오고 있다. 2015년에는 3대째 이어온 창업주 가족으로부터 경영권을 양도받아 양조장 주인이 됐다.

제일양조장은 ‘괴산에서 제일가는 막걸리’로 여겨질 만큼 뛰어난 맛을 자랑한다. 술항아리에서 막걸리 한 모금을 떠 마셔보니 뒷맛이 개운한 시원함이 밀려왔다. 전통 막걸리는 고두밥(지에밥)에 누룩(술을 만들 때 쓰는 발효제) 등을 섞어 술항아리 안에서 일정 시간 동안 발효시켜 만든다. 언뜻 간단해보이지만 재료의 비율과 숙성 시간에 따라 맛이 제각각이다. 특별한 비법이 있을까.

“막걸리는 발효식품인지라 제조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이 무척 중요합니다. 술독에서 나는 소리와 냄새로도 어떤 막걸리가 나올지 알 수 있죠. 노하우를 알려줘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막걸리는 시대에 따라 부침이 컸다. 우리나라의 술 전통은 원래 집집마다 만드는 가양주(家釀酒) 형태로 전승돼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가정에서 만든 술의 면허제를 폐지하면서 양조장 체제로 바뀌게 된다. 현재 남아있는 전통 양조장 대부분이 1930년대 이후에 생겨난 배경이기도 하다. 쌀이 부족했던 1960~70년대에는 법으로 막걸리 제조에 쌀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읍면 단위별 양조장 허가제 등 각종 규제에 묶여 산업적으로 성장하기 힘든 측면도 있었다.

“쌀을 못 쓰게 하던 정부가 1977년도에 갑자기 통일벼를 쓰라고 하는 지침이 내려왔어요. 하루아침에 원료를 바꾸니 막걸리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속상하기도 했죠. 지금은 쌀과 밀을 섞어 가장 맛있는 비율로 만들고 있어요. 배운 게 막걸리밖에 없으니 힘이 닿는 한 계속 만들어야죠.”

● 3대를 이어온 전통 ‘우리 모두의 유산’
충남 괴산 목도양조장. 사진 전영한기자 scoopjyh@donga.com
충남 괴산 목도양조장. 사진 전영한기자 scoopjyh@donga.com

“제2회 전조선 주유품평회에 괴산주조주식회사의 제2공장약주가 1등으로 당선됐다.”

동아일보 1939년 12월 26일자에는 당시 전국 술 평가대회 결과를 보도했다. 여기서 소개된 ‘괴산주조주식회사’가 지금의 ‘목도양조장’이다. 조선 최고의 술도가로 뽑혔던 이곳은 1931년 설립 이후 현재 창업주의 3세인 유기옥 씨(60)가 운영한다.

실은 40여 년 동안 위탁경영을 했었다. 유 씨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뜨면서 어쩔 수 없이 양조장 경영을 외부에 맡겼다. 이후 전통 막걸리 시장이 계속해서 위축됐고, 결국 2013년 일하던 이들이 모두 양조장을 떠났다.

“80년 역사를 간직한 곳인데 도저히 문을 닫을 수는 없었어요. 결국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통을 이어가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런 마음 덕분인지 목도양조장 막걸리는 ‘옛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정성을 쏟고 있다. 묵직하면서 텁텁한, 다소 촌스러운 ‘그 맛’ 말이다. 양조장 옆으로 ‘달천’이란 강이 흐르는데, 물맛이 달아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은 지하수를 길러 막걸리 제조에 쓴다. 주말이면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인 남편이 직접 오토바이를 몰고 막걸리 1병이라도 직접 배달할 정도로 막걸리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이어오고 있다.

“주위에서는 더 잘 팔릴 수 있게 설탕이라도 좀 치라지만, 전통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양조장은 저와 제 가족의 것만이 아니니까요. 누군가는 꼭 이어가야할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니까요.”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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